[건립위원회 소식]반세기가 지난 뒤, 지금 여기 아픈 전태일이 아픈 전태일에게


▲전태일 열사 54주기인 13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 시민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연합뉴스



여전히 나의 나인 '전태일들'은 아픕니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이후로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났습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십 몇 위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병이 들었는데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전태일은 아팠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의 지독한 가난에 상처받고 마음 속 깊은 아픔을 품고 산 청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이 늘 아픕니다. 삶이란 손톱 끝의 작은 상처부터 시작해서 늘 다치고 다시 회복하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아픔이 몸의 질병으로 바뀔지 기적 그 자체인 삶에 대한 각성과 자비심으로 승화될지는 그야말로 자신의 마음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이웃의 마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은 사람을 자비와 연민으로 이끕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그런 자비와 연민의 헌신이었습니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 예수와 붓다와 무함마드가 이루고자 했던 우애와 환대의 이웃공동체 실천이었습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어린 생명 곁으로 돌아가면서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굴린 덩이를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갔습니다. 그 이후 전태일이 '나의 나'라고 호명했던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 성직자, 심지어 경영자까지도 전태일의 삶을 살고자 스스로 전태일이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분출했고, 세상은 바뀐 듯 보였습니다.

실제로 세상은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불평등은 더 극한으로 치달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우애와 환대의 나눔 공동체, 이웃공동체는 갈갈이 찢기고 해체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후지옥과 극단의 불평등, 초지능의 등장까지 코 앞으로 다가온 21세기 지금 여기, 세상은 칸막이 골방에 갇혀 디지털 도파민에 중독된 '홀로'들의 천지로 변했습니다. 아픈 홀로가 아픈 홀로와 경쟁하고 불신하는 아수라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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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전태일들의 응답, 녹색병원 전태일의료센터

세상의 기적같은 사건은 대부분 늘 그것이 기적이었음을 뒤늦게서야 알게 됩니다. 22살의 무학에 가까운 어느 청년의 분신이 기적이었음을 우리는 분신 이후에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조영래가 전태일평전을 '도바리 치면서' 집필한 것이 기적이었음도 뒤늦게 알게 됩니다.

2023년 9월 20일 녹색병원이 '전태일의료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기금 모금을 시작한 것은 기적의 사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1970년의 '지금 여기'에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깊고 넓고 멀리 외친 전태일의 부름에 무려 53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수많은 전태일들이 응답하는 생생한 자비행의 사건입니다.

전태일의료센터의 누리집 첫화면에 들어가면 깜깜한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흰 점들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 점에 마우스를 갖다 대면 녹색의 사람 이름이 뜨고 누르면 녹색의 사연이 드러납니다. 그 점이 벌써 2024년 11월 25일 현재 7,161명, 138개 단체, 17억원이 넘었습니다.

그 점은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온전하게 이 우주와 지구별 생태계에 통합된 소우주 그 자체입니다. 지구별 생명체는 모두 서로 함께 연결되어 존재하는 '하나'입니다. 홀로란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개념일 뿐입니다.

'홀로'의 감옥 속 삶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멈추면 됩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질주를 멈추고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백팔십도 다른 삶과 세상이 펼쳐집니다. 거기에는 돈과 권력과 성공 대신 이웃들이 있습니다.

깜깜한 핵개인의 원룸 쳇바퀴 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와 별을 보면 다름아닌 내가 별입니다. 나 자신이 기적 같은 지금 여기 지구별 생명체의 드넓은 녹색 세상 속의 전태일입니다.

그 숲에서 깊은 숨을 들이마셔야 우리 안의 깨어남이 일어납니다. 나의 나인 전태일의 자비행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자비와 연민으로 불타는 우리의 마음과 세상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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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반세기가 지난 뒤, 지금 여기 아픈 전태일이 아픈 전태일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