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에는 1천만 원 이상 기부자에게 감사패를 증정하는 예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본인 수락 여부 동의시). 2024년 12월에 박규태·이경희 부부께서 추진위원으로 동참하며 각각 2,500만원씩 총 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보내주셨습니다. 두 분을 뵙고 나눈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Q. 맨 처음 두 분이 각자 명의로 따로 후원금을 보내주셨을 때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실까, 궁금했어요. 두 분의 자기소개와 근황을 부탁드립니다.
> 박규태 님
대학 시절에는 독일 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때 종교학을 공부하다가 일본 유학을 가서 일본 문화에 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24년 정년 퇴임했습니다. 종교, 예술은 저의 생애 주제였어요. 저는 정적인 사람이라 그냥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책 쓰기죠. 일본 문화나 특히 일본 종교를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소개해 왔어요.
> 이경희 님
저도 작년에 정년 퇴임을 했어요. 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일했지요. 규칙적으로 나가던 일터에 안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저희집 근처에 바로 과천교회가 있거든요. 요즈음은 거기 본격적으로 출석하고 있어요. 제가 성악을 전공했는데요. 수요 예배, 금요 예배, 주일 예배까지.. 성가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모임도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바빠졌어요. 오히려 지금은 백수로 과로하고 있는 셈이죠. (웃음)
Q. 전태일의료센터는 어떻게 알게 되셨을까요?
> 박규태 님
작년에 제가 약속이 있어서 청계천을 오랜만에 나갔는데 그곳에 전태일 거리, 전태일 다리가 있잖아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제가 친형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형님이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 문제나 노동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문학에 뜻을 가지게 된 것도 형 영향이 컸죠. 형님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을 쌓아놓고 다 읽었어요. 야학도 하고, 대학에서 운동도 열심히 하셨어요. 술을 정말 잘 드시고 좋아했는데, 어느 날 만취해서 차 사고를 당했어요.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해라” 그러더군요. 가난한 형편에 부모님이 일을 차치하고 형을 돌봐야 했던 시절, 머리를 크게 다쳐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누워만 있었는데, 1년이 지나면서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왔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형 병실에 있으면서 그 모습들을 다 지켜봤죠.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실천적이었던, 저와는 정반대 성향이었던 형님도 한순간에 저렇게 되는구나. 모든 건 한계를 안고 있구나.. 형님이 백지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인생에 어떤 방향이 정해진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의식을 회복한 형님이 공부모임을 추천했어요. 당시는 많은 대학생들이 지하써클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죠. 신림동 하숙방에 모여 책을 같이 읽고 토론도 했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제가 어쩌다 이론을 제기하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소통이 반복되면서 이게 나한테는 잘 안 맞는구나, 중단을 했어요. 그렇지만 그 당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빚은 남았어요.
시간이 흐르고 우연한 기회에 청계천 여공들을 위한 교회 야학 프로그램에서 기타를 가르치는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기타를 좋아하고 초보자를 가르칠 정도의 수준은 되니까 몇 달간 그걸 했죠. 대학원생 때였는데 그 기억이 아련합니다.
그렇게 작년 전태일 거리를 다녀온 뒤 인터넷에 ‘전태일’을 검색해 다시 읽고, 그러다가 전태일의료센터를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와이프한테 이야기했어요. 이쪽으로 우리가 마음을 좀 나눴으면 좋겠다고.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졌네요.
> 이경희 님
정년 퇴임을 앞두면서 자연스럽게 ‘웰다잉’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제 인생 2막을 시작해야 되는데, 뭔가를 의미 있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어떻게 잘 살아야 될까, 고민이 많이 되더군요. 무엇보다 퇴직금을 받게 되면서 생긴 목돈으로 의미있는 실천을 하고 싶었어요. 외국 아이들을 돕는 기부단체에 몇만 원씩 후원하는 건 늘 해왔지만, 뭔가 다른 건 없을까? 그런 걸 찾아보자고 스스로와 약속했어요. 물론 그렇게 안 한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잖아요. 사실 저 혼자 한 약속이니까. 내가 과연 실천할 수 있을까? 저 자신한테 반신반의했지만, 작년에 ‘국경 없는 의사회’에 기부를 하면서 일단 저와의 약속을 지켰어요. 너무 뿌듯하고 감사하고, 저 자신이 굉장히 대견스러웠어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죠. 아, 이게 참 좋은 거구나, 싶었어요.
그즈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희 남매들에게 많지는 않지만 유산 상속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 이렇게 또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 걸까.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의미있게 써야 할까’ 싶었죠. 남편과는 늘 그런 얘기를 나눠왔던 터라 이번에도 뭔가를 하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선뜻 “전태일의료센터에 기부하면 어떨까” 얘기를 한 거죠. 제가 예전에 전태일 열사 영화도 보고 관심은 좀 있었지만, 생각이 더 깊게 나아가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남편이 그 얘기를 하는데 ‘아 그렇지, 그 사람들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그렇게 같이 의논해서 각자 후원을 하게 되었어요.

Q. 이런 말씀과 마음이 참 놀랍게 다가옵니다. 결코 쉽지않은 일이잖아요.
> 이경희 님
그렇게 건강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저희 어머니도 결국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인생이라는 게 참 그렇죠.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노인으로 살다 가고 싶다’, ‘의미 있게 살다 죽어야겠다..’ 하는 마음이지만 그 방법을 잘 모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고민이 돼요. 저희 부부는 사회 환원에 관심을 갖다보니 기부에 눈을 돌리게 된 거죠. ‘내가 죽을 때가 다 되면 그때 기부를 하고 떠나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당장 가능할 때 조금씩 실천하자, 싶었어요.
> 박규태 님
작년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시민들이 탄핵을 요구하면서 광화문에서 크리스마스 콘서트 겸 집회를 한다고 해 나갔어요. 정치야말로 가장 고도의 예술이어야 한다는데, 우리 정치가 거기서 많이 멀어져 있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응원봉을 들고 추운 거리에서 자리를 지키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희망이 느껴졌어요.
녹색병원, 전태일의료센터도 우리 사회가 눈 돌리지 못하는 부분에 주목해 공익적 역할을 해 나가고 있으니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돕고, 그 존재를 잊지 않고, 힘들 때 함께 의지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저희 부부도 할 수 있는 실천으로 동참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박규태 님의 저서 『한과 모노노아와레 - 한일 미의식 산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맞춤형 응원 글에 담긴 세심하고 다정한 마음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에는 1천만 원 이상 기부자에게 감사패를 증정하는 예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본인 수락 여부 동의시). 2024년 12월에 박규태·이경희 부부께서 추진위원으로 동참하며 각각 2,500만원씩 총 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보내주셨습니다. 두 분을 뵙고 나눈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Q. 맨 처음 두 분이 각자 명의로 따로 후원금을 보내주셨을 때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실까, 궁금했어요. 두 분의 자기소개와 근황을 부탁드립니다.
> 박규태 님
대학 시절에는 독일 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때 종교학을 공부하다가 일본 유학을 가서 일본 문화에 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24년 정년 퇴임했습니다. 종교, 예술은 저의 생애 주제였어요. 저는 정적인 사람이라 그냥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책 쓰기죠. 일본 문화나 특히 일본 종교를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소개해 왔어요.
> 이경희 님
저도 작년에 정년 퇴임을 했어요. 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일했지요. 규칙적으로 나가던 일터에 안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저희집 근처에 바로 과천교회가 있거든요. 요즈음은 거기 본격적으로 출석하고 있어요. 제가 성악을 전공했는데요. 수요 예배, 금요 예배, 주일 예배까지.. 성가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모임도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바빠졌어요. 오히려 지금은 백수로 과로하고 있는 셈이죠. (웃음)
Q. 전태일의료센터는 어떻게 알게 되셨을까요?
> 박규태 님
작년에 제가 약속이 있어서 청계천을 오랜만에 나갔는데 그곳에 전태일 거리, 전태일 다리가 있잖아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제가 친형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형님이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 문제나 노동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문학에 뜻을 가지게 된 것도 형 영향이 컸죠. 형님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을 쌓아놓고 다 읽었어요. 야학도 하고, 대학에서 운동도 열심히 하셨어요. 술을 정말 잘 드시고 좋아했는데, 어느 날 만취해서 차 사고를 당했어요.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해라” 그러더군요. 가난한 형편에 부모님이 일을 차치하고 형을 돌봐야 했던 시절, 머리를 크게 다쳐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누워만 있었는데, 1년이 지나면서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왔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형 병실에 있으면서 그 모습들을 다 지켜봤죠.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실천적이었던, 저와는 정반대 성향이었던 형님도 한순간에 저렇게 되는구나. 모든 건 한계를 안고 있구나.. 형님이 백지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인생에 어떤 방향이 정해진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의식을 회복한 형님이 공부모임을 추천했어요. 당시는 많은 대학생들이 지하써클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죠. 신림동 하숙방에 모여 책을 같이 읽고 토론도 했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제가 어쩌다 이론을 제기하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소통이 반복되면서 이게 나한테는 잘 안 맞는구나, 중단을 했어요. 그렇지만 그 당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빚은 남았어요.
시간이 흐르고 우연한 기회에 청계천 여공들을 위한 교회 야학 프로그램에서 기타를 가르치는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기타를 좋아하고 초보자를 가르칠 정도의 수준은 되니까 몇 달간 그걸 했죠. 대학원생 때였는데 그 기억이 아련합니다.
그렇게 작년 전태일 거리를 다녀온 뒤 인터넷에 ‘전태일’을 검색해 다시 읽고, 그러다가 전태일의료센터를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와이프한테 이야기했어요. 이쪽으로 우리가 마음을 좀 나눴으면 좋겠다고.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졌네요.
> 이경희 님
정년 퇴임을 앞두면서 자연스럽게 ‘웰다잉’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제 인생 2막을 시작해야 되는데, 뭔가를 의미 있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어떻게 잘 살아야 될까, 고민이 많이 되더군요. 무엇보다 퇴직금을 받게 되면서 생긴 목돈으로 의미있는 실천을 하고 싶었어요. 외국 아이들을 돕는 기부단체에 몇만 원씩 후원하는 건 늘 해왔지만, 뭔가 다른 건 없을까? 그런 걸 찾아보자고 스스로와 약속했어요. 물론 그렇게 안 한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잖아요. 사실 저 혼자 한 약속이니까. 내가 과연 실천할 수 있을까? 저 자신한테 반신반의했지만, 작년에 ‘국경 없는 의사회’에 기부를 하면서 일단 저와의 약속을 지켰어요. 너무 뿌듯하고 감사하고, 저 자신이 굉장히 대견스러웠어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죠. 아, 이게 참 좋은 거구나, 싶었어요.
그즈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희 남매들에게 많지는 않지만 유산 상속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 이렇게 또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 걸까.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의미있게 써야 할까’ 싶었죠. 남편과는 늘 그런 얘기를 나눠왔던 터라 이번에도 뭔가를 하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선뜻 “전태일의료센터에 기부하면 어떨까” 얘기를 한 거죠. 제가 예전에 전태일 열사 영화도 보고 관심은 좀 있었지만, 생각이 더 깊게 나아가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남편이 그 얘기를 하는데 ‘아 그렇지, 그 사람들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그렇게 같이 의논해서 각자 후원을 하게 되었어요.
Q. 이런 말씀과 마음이 참 놀랍게 다가옵니다. 결코 쉽지않은 일이잖아요.
> 이경희 님
그렇게 건강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저희 어머니도 결국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인생이라는 게 참 그렇죠.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노인으로 살다 가고 싶다’, ‘의미 있게 살다 죽어야겠다..’ 하는 마음이지만 그 방법을 잘 모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고민이 돼요. 저희 부부는 사회 환원에 관심을 갖다보니 기부에 눈을 돌리게 된 거죠. ‘내가 죽을 때가 다 되면 그때 기부를 하고 떠나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당장 가능할 때 조금씩 실천하자, 싶었어요.
> 박규태 님
작년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시민들이 탄핵을 요구하면서 광화문에서 크리스마스 콘서트 겸 집회를 한다고 해 나갔어요. 정치야말로 가장 고도의 예술이어야 한다는데, 우리 정치가 거기서 많이 멀어져 있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응원봉을 들고 추운 거리에서 자리를 지키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희망이 느껴졌어요.
녹색병원, 전태일의료센터도 우리 사회가 눈 돌리지 못하는 부분에 주목해 공익적 역할을 해 나가고 있으니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돕고, 그 존재를 잊지 않고, 힘들 때 함께 의지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저희 부부도 할 수 있는 실천으로 동참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박규태 님의 저서 『한과 모노노아와레 - 한일 미의식 산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맞춤형 응원 글에 담긴 세심하고 다정한 마음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