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립위원회 소식]시사in 연재 [은유의 ‘먹고사는 일’] 산재 사망 전 남편의 마지막 식사 ‘김치김밥’을 말다


한국 사회에서 ‘산재 유가족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도 기업은 벌금만 내면 그만인 현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산업재해는 뉴스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21년 평택항에서 사망한 이선호씨가 가장 좋아한 음식은 어머니의 시금치나물이었습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씨가 가장 좋아한 갈비찜은, 이듬해 1주기 그의 추도식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나눠먹은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시금치나물과 갈비찜 같은 일상의 음식이, 선호씨와 용균씨가 안전하게 일을 마치고 퇴근해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르포 작가 은유씨가 한 달에 한 번,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위대함을 길어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사IN〉은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듣고 널리 알려, 일하는 사람들이 덜 죽고 덜 다치는 세상을 만드는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의 마중물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김영희씨(오른쪽)와 은유 작가가 7월1일 서울 합정동 김씨의 딸 자택에서 만났다. ⓒ시사IN 이명익



“영희야, 철수야 놀자~ 할 때 그 영희예요. 근데 철수가 없어서….”


김영희씨(60)는 부산 사투리의 활달한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재빠른 손놀림으로 참외 서너 개를 깎아서는 접시에 뚝딱 담아낸다. 단물이 밴 참외를 포크로 찍어서 취재진의 입 가까이 건네는 와중에도 그는 못내 아쉽다. “수박도 좀 사놓을 걸 그랬네. 수박이 없어서 우짜노.”


한평생 짝을 이루어 살던 영희의 배우자 ‘철수’는 고 정순규씨다. 2019년 10월31일 부산 남구 경동건설 아파트 신축현장에서 작업 중 추락해 숨졌다. 이 말은 제철 과일을 깎아놓고 무심하게 건네던 사십 년 옆지기가 사라졌다는 뜻이고, 영희가 하루아침에 산재 피해 유가족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 한국 사회에서 유가족이 된다는 건 사망 원인을 죽은 사람의 과실로 몰아가는 사용자 측과 질긴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이고, 사람이 일하다가 죽었는데도 기업은 벌금만 내면 그만인 잔인한 현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황망한 일상에서 그가 의지한 것은 부처님과 죽은 남편이다. 그리움에 목메는 날이면 유튜브로 법문 들으며 마음을 달래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납골당에 들렀다. 거의 매주 남편을 만나서 하소연을 한바탕 풀어놓고 밤마다 울면서 잠들었다.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이제 영희는 ‘철수’에게 차려준 마지막 밥, 그러니까 사고 당일 고인이 먹은 ‘마지막 김밥’ 이야기를 눈물 없이 꺼낸다.


“남편이 새벽 5시40분쯤 나가요. 그럼 저는 5시10분쯤 일어나죠. 눈 뜨고 바로 먹으면 입맛이 없으니까 가면서 먹으라고 김치김밥을 싸요. 밥에 참기름 넣어서 맛소금 약간 뿌려 김 위에 깔고 김치 한 줄 넣고. 게맛살이나 소시지는 있으면 넣고 없으면 패스. 김치를 꼭 짜서 넣죠. 거창 김치예요.”


아는 형님이 거창에서 사과 농장을 한다. 고랭지라서 사과가 맛있고 배추도 맛있다. 바쁠 때 일손을 거들어주고 1년 먹을 김치를 얻어오곤 했다. 그날도 맛깔스러운 거창 김치를 길게 쭉쭉 찢어 넣고 김밥을 말아서 출근하는 남편 손에 들려 보냈다. 사고가 나고 며칠 후, 옷과 신발 등 유품이 담긴 쇼핑백을 챙겨 오는데 그 속에서 플라스틱 김밥통이 달그락거렸다. 다행히 김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든든한 속으로 떠난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텅 빈 통을 보자 눈물이 났다. 늘 말이라도 “느그 엄마 해주는 게 젤 맛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애들에게는 “느그 엄마 눈물 나게 하면 죽는다”라고 다정한 엄포를 놓던 사람 대신 ‘락앤락’ 김밥통만 돌아온 것으로 남편의 부재는 현실이 되었다.



김영희씨가 정순규씨의 생전 마지막 식사였던 김치김밥을 만들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김영희씨가 만든 김치김밥은 산업재해로 숨진 정순규씨의 생전 마지막 식사였다. ⓒ시사IN 이명익



마지막이 된 평범한 아침이 그러하듯 고인과의 쨍하게 행복했던 풍경에도 음식은 빠지질 않는다. 정순규씨는 30대에 경남 양산에서 작은 공장을 5년간 운영했다. 기계 옮기는, 건물 짓는, 물건 담는 용도 등 기계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 늦둥이 딸 예림이가 태어나기 전 승남, 석채 남매만 키우던 시절이다. 친구들 가족 동반 모임에서도 가고, 공장 식구들과도 가고, 1년에 몇 번씩 섬진강으로 떠났다.


사망 사흘 전 “일만 하다 죽을 거 같다”

“남편이 뭘 잘 잡아요. 손으로 잡거든요. 몸은 빼빼하이 키도 큰데 손이 거인 손처럼 커요. 남들은 못 잡는 참게도 손을 넣어서 잡아요. 비가 오면 논두렁 밭두렁 고랑에 미꾸라지가 많았죠. 남편은 미꾸라지가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승남이랑 석채랑 데리고 가서 발로 막 이렇게 하면 애들이 뒤에서 뜰채로 잡고, 토종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한 솥 끓여가지고 먹었어요.”


갈고리 같은 손으로 재첩도 잡고, 은어도 잡고, 피라미도 잡았다. 그러면 영희는 피라미를 프라이팬에 동그랗게 돌려서 고추장 양념을 싹 뿌려서 도리뱅뱅이를 구워냈다. 친구들과 날짜가 안 맞으면 가족끼리라도 가서 텐트를 치고 놀았다. 손낚시 선수인 남편이 사고를 당하자 25~26년 정도 이어오던 가족 동반 모임이 흐지부지되었다. 아이들은 아직도 온 가족이 섬진강에서 놀던 때를, 섬진강을 맨손으로 누비던 영웅 같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남편이 현장 일을 하느라 여기저기 많이 다니고 시골에서 살아놓으니까 촌에서 자란 식물이나 나무 이름을 잘 알아요. 참옻이 있고 개옻이 있는데, 참옻이 토종 옻이고 진액도 많이 우러난대요. 명절이나 애들이 집에 내려오거나 손님이 오면 해줬죠. 옻을 6~7시간 고면 노랗게 우러나요. 옻을 건져내고 폐닭을 넣어서 푹 고아서 찹쌀을 면보 같은 데 싸서 넣고 푹 고면 국물이 너무 진짜 맛있어요. 위장 안 좋은 사람한테 좋아요. 해마다 한두 번 옻닭을 연중행사로 해줬어요. 티비에 한 번씩 옻닭 먹는 게 나오면 남편이 억수로 생각나요.”


고인은 IMF 외환위기를 지나며 공장을 접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경력에 따라 오른 인건비가 취업의 걸림돌이 됐다. 연봉을 낮춰서라도 일하기로 마음먹고 2017년 JM건설에 들어갔다. 하청업체이다 보니 나라에서 주는 일도 하고, 학교 일도 했다. 현장에 따라 어떤 일도 무리없이 해내는 베테랑다웠다. “남편이 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아파트 현장처럼 위험하진 않았고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었어요.” 그러다가 경동건설 아파트 공사 현장을 맡게 되었다. “거기는 사람을 안 쉬게 했다”라며 김영희씨는 한숨을 지었다.


“남편 몸무게가 60킬로가 안 나가요. 10월12일인가 마지막 여행이 되었는데... 설악산 봉정암에서 내려오는 길에 목욕을 싹 해요. 근데 남편이 목욕탕에서 나오더니 몸무게가 5킬로그램이 빠졌대요. 제 생각에는 스트레스 받으니까 점점 빠진 거 같아요. 남편이 돌아가시기 사흘 전인가. 일 갔다가 너무 힘든 모습으로 와서는, 내를 부를 때 승남이(큰딸) 이름 끝자만 따서 남아, 남아 했거든요. ‘남아, 일만 하다 죽을 거 같다’ 이랬던 게 기억이 나요.”


매일 하루에 두 명이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산재의 나라’에서 고인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못했다. 유명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던 아들 석채는 아버지가 죽은 후 생업을 그만두고 피해자 과실로 몰아가는 사용자 측의 행태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정순규씨는 공사 현장 옹벽을 고르기 위해 4.2m 높이의 임시 구조물(비계)에 올랐다가 추락했다.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안전 통로와 발판, 추락 방지용 덮개는 사고 사흘 만에 보완됐다. 이 같은 사실은 ‘중대재해 없는 세상 만들기 부산운동본부’와 천주교 노동사목위원회의 도움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업무상과실치사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경동건설 관리소장과 하청업체 JM건설 이사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경동건설과 JM건설은 각각 벌금 1000만원이 확정된 상태다. 하지만 원청인 경동건설과 하청 JM건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없다.


정순규씨 유가족이 2022년 4월27일 ‘2022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용균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많이 됐잖아요. 저는 그때 부산에 있으면서 ‘저 젊은 아가 우짜겠노, 저리 됐구나’ 하면서 그냥 공감만 하고 안타깝다만 했어요. 근데 1년 있다가 같은 유족으로 만나는 걸 누가 생각했겠어요. 산재 사고가 너무 자주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또 일어났네, 이렇게 돼요. 무감각해진다고 해야 하나 무뎌진다고 해야 하나.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김영희씨는 현재 요양보호사로 짬짬이 일한다. 손녀를 돌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는 8년간 간호조무사로 일했다. 대학교 다닐 때 빼고는 뭐라도 했지,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결혼할 때 남편은 “나중에 꼭 대학에 보내주겠다”라고 약속했고, 셋째 예림이가 어린이집 다닐 때 그는 만학도 특별전형으로 전문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바로 방송대 교육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했어요.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 1년 하다가 비리가 너무 많아서 그만뒀어요. 원장이 먹는 걸로 다 빼돌리고. 사진 올릴 때는 어린이 식판에 밥도 국도 밥찬도 소복하게 담는데 사진 찍고 나면 두부 한 모 가지고 80명이 나눠 먹어요. 그럼 선생님들도 먹을 게 없어요. 여기서 일을 못하겠다고 때려치우고, 예전에 간호조무사 자격증 따놓은 걸로 요양원에서 일한 거예요.”



산재 노동자 유족을 위한 병원

남편을 떠나보낸 후에는 1년 내내 같은 바지만 빨아 입고 로션 하나만 바른 채 직장을 다녔다.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가 돌보는 어르신들 치매 검사나 우울증 검사지 항목을 보면 자신이 거의 다 해당됐다. 보다 못한 아들 석채가 엄마에게 심리 상담을 권했지만 거절하고 “일로 삭였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다가 엄마의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아들의 손에 이끌려 녹색병원을 갔다. 골다공증 진단이 나왔다. “내 나이대에 나올 수 없는 높은 수치가 나왔대요. 주사 치료를 시작해서 7월이면 딱 1년이 돼요. 녹색병원에서 유족은 30%를 할인해줘요. 세상에 누가 유족의 아픔을 알아주나요. 산재 노동자 유족을 위한 병원이 있으니까 너무 감사하죠.”



김영희씨는 녹색병원을 ‘유족을 위한 병원’이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병원을 오가는 두 시간 동안 김영희씨는 지하철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 먼저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경동건설’을 검색하고 그 기사를 아는 사람에게 퍼나른다. 기사가 많이 공유되어야 사건의 불씨가 꺼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댓글을 단다. 댓글창에 쓰는 이름은 이진실, 경동이, (사고가 난 동네) 문현동 등 여러 개다. 꼭꼭 눌러쓴 내용은 이렇다. ‘기업 살인을 하고도 너무나 뻔뻔한 경동건설 안전 관계자들 지금 너무 좋아하고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고 정순규님의 진실 규명은 꼭 이루어집니다. 그때는 무릎꿇고 빌어도 늦어요. 유족분들에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입니다.’


최근 아들 정석채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청년 노동자에 비해 중장년 노동자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선 그도 할 말이 많다. “나이를 갖고 죽음을 차별하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어느 정도 살았으니까 아깝지 않지, 라는 생각은 직접 안 겪어봐서 하는 거죠. 겪어보면 그런 말 못해요. 나이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유족 입장에서는 똑같아요. 죽음에는 차별이 없어야죠.”


김영희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남편의 마지막 식사인 김치김밥을 말았다. 거창 김치가 아니라서, 밥이 질어서, 남편에게 해준 그 맛이 아니라고 연신 탄식했지만 잡곡밥과 톡 쏘는 김치로 싼 김치김밥은 썰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자꾸만 손이 가는, 깊고 슴슴한 맛이었다. 이제 그는 김밥 싼 걸 치우고 나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손녀를 위한 밥을 차려야 한다. 지금껏 나 자신을 위한 요리는 해본 적이 없고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거밖에 모르고 살았다는 영희. 그렇지만 그에겐 그게 그거다. “가족들이 잘 먹으면 내 배가 부르죠. 애들 얼굴 보고 에너지를 받고 음식도 애들 거 하다 보면 내도 먹으니까.” 취재진이 멀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거듭거듭 말했다. 다음에 꼭 ‘제대로 된 김밥’을 대접하고 싶다고. 옛날 할머니들 말씀대로 ‘혼자만 묵으면 도치기(인색하고 인정이 없는 사람), 노나 묵으면 부챗님’이라면 영희는 부챗님이다. 배우고 일하고 먹이는 일에 여한 없는 삶이다.




은유의 '먹고사는 일'은 시사in에서 연재 중입니다.(2024.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