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6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여정에 많은 기부자가 함께하고 계신 가운데, 환갑을 기념해 후배들이 마련해준 축하공연 수익금을 전태일의료센터 건립기금으로 기부한 분이 있는데요. 바로 유수훈 님입니다. 유수훈 님은 대학시절 환경운동을 시작해 문화·공연 기획자로 일하며 지금까지 500여 회에 달하는 공연 연출, 20여 장의 음반 제작과 다양한 전시 기획을 해왔고, 현재 부천국제만화축제 총괄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함께하는시민행동 공동대표이자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비상행동 공동대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 문화예술분과 총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유수훈 님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함께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이 병원의 이름은 '나'이자 '당신'이며, '우리 모두'입니다


Q1.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 사무국에서 2024년 6월경, 행사기획 자문을 요청하러 유수훈 님을 찾아갔었지요. 그때 어떤 마음이셨나요?

 음... 사실 제가 뭘 크게 많이 도와주거나 함께 하겠다, 이런 생각은 전혀 없이 만났지요. 제가 처한 상황이, 몸도 좀 아프고 나이도 이제 60이 코 앞이던 시기라 앞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지요. 처음 만났을 때는 예의 있게, 그러나 좀 성의 없이 대화를 하고 헤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Q2. 2024년 초순까지 ‘다시는 선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기도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의료센터와 만나고 1년 가까이 함께하고 계신데요. 기도의 마음이 바뀌신 걸까요?

 ‘다시는 선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건 너무 센 표현이고, ‘선한 일에서 잘 은퇴하는 것’이 2023년 기도 제목이었어요. 의미있게 사회활동을 하더라도 너무 길어지면 후배들에게 가야할 기회가 줄어든다는 고민이 많던 시기라 그런 생각이 컸죠.

그런데 건립위원회 사무국 분들을 만나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하는데 ‘전태일’, ‘녹색병원’, 이게 자꾸 마음에 남는 거예요. 녹색병원은 세계에서 아마 유일한 병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나라가 공해산업을 마구 수입하던 때, 인견사를 만들던 원진레이온이라는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이 직업병에 걸리고, 그게 계기가 돼서 만든 병원이죠. 그리고 20여 년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녹색병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도 운영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었는데 제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녹색병원이 새로운 병원을 짓는데 그 이름이 ‘전태일의료센터’라니. 마음이 뛰고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전태일’은 우리 세대에게는 늘 빛이고 빚이었지요. 그가 일깨워 준 마음을 갖고 살자는 다짐을 하게 해주는 ‘빛’이고, 그럼에도 이웃과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늘 내놓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라 늘 ‘빚’진 자로 살아가야 하는 부채감 어린 이름이죠. 그런데 “이 병원의 이름이 ‘전태일’이고, ‘폐지줍는 어르신’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그리고 바로 ‘나’이고 ‘당신’, ‘우리’”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무슨 일을 할 때 그 뜻이 좋은지, 그 일을 하는 단체나 조직이 얼마나 건실한지,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이 녹색병원에서 10년, 20년을 넘게 일하는 실무자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면서 존경이랄까요, 머리가 절로 숙여지는 감사의 마음을 느꼈어요. 오랜 시간 겪었을 많은 어려움과 아픔에 조금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흔히 ‘병원’ 하면 늘 의사나 간호사만 생각하지, 병원 일이 잘 돌아가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소중함이 얼마나 간과되는지 모릅니다. 이건 무슨 영역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요. 그렇게 오래도록 병원에서 일해온 실무자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데, 그냥 녹색병원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텐데 병원을 또 짓겠다니, 그래서 모금을 50억이나 하겠다니요. 그분들을 보면서 제가 전태일의료센터 일을 꼭 함께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Q3. 후배들이 열어준 환갑연을 전태일의료센터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로 진행하셨죠. 10만원 공연비를 낸 이들을 추진위원으로 모셨고, 공연이 끝난 후 1천만 원이 넘는 후원금을 보내주셨습니다. 공연 포스터도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이 생일공연은 지금까지 7~8번 정도 해왔던 이벤트예요. 제가 나이 50살을 넘기면서, 자신의 공연을 열지 못하는 후배들을 위해 제 생일을 빙자해 후배들을 위한 공연을 열어 주자는 취지로 해온 거죠. 이번에는 사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이제는 그런 데서 은퇴하겠노라 공언하기도 했기에 60살 공연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었는데요. 전태일의료센터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이철수 판화전’을 준비하다가 문득 ‘아, 이번 생일공연은 전태일의료센터 돕기 공연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병원의 이름은 유수훈입니다”를 타이틀로 해서요. 그래서 출연하는 후배들, 기획하는 후배들이 모두 선뜻 노-개런티, 기부에 동참하는 공연을 열었고 생각보다 기금이 많이 모여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친구들도 있어요. 본인 말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좀 보수적인’(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매우 보수적인) 친구, 후배 몇 명이 공연에 와서 “네가 하는 거라서 돈도 내고 참여했다”는 말을 들었죠. 그리고 “직접 오지도 못하고, 돈이 없어서 3만 원밖에 못 보태 미안하다”던 후배 음악인의 카톡을 받고 눈물이 나더군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짓는 병원이 ‘전태일의료센터’라는 생각에 좀 뭉클했습니다.

 

Q4. 건립 기금 모금 50억 달성이 눈앞에 있습니다. 전태일의료센터와 함께하며 기억에 남고 뿌듯했던 순간은?

 ‘탄핵’을 요구하며 서울로 올라온 농민과 시민들의 남태령투쟁 이후 갑자기 모금이 늘었을 때 20·30대 젊은이들에게 감동했어요. ‘함께 하고 나눈다’는 것의 의미와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분들에게 정말 마음을 다해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런 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아닐까요. 그 혜택을 전태일의료센터가 받았다는 것에 많은 감사와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잘 짓고 잘 운영하는 병원, 누구에게나 문턱 없는 병원, 시민이 함께 운영하는 병원. 그야말로 이 병원의 이름은 ‘우리’인 거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녹색병원을 운영하고 전태일의료센터를 짓기 위해 많은 일을 진행해 온 분들의 땀과 정성이 헛되지 않게, 그리고 하나하나 모인 시민들의 바람을 잘 실현하는 병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0억 모금 성공은 기적 같은 일이에요. 하지만 50억만으로 병원이 지어지지 않고, 또 짓는다 해도 운영이 쉽지 않죠. 이제 시작인 것 같습니다.

 

Q5. 우려되는 점, 앞으로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요?

병원을 짓는 데만 200억가량이 넘게 들 것이고, 짓고 나서 이런저런 돈 안 되는(^^;) 일을 하려면 모금도 더 해야 하고요. 특히 매달 후원금을 내는 전태일의료센터의 ‘평생친구’를 얼마나 많이 모시느냐가 중요할 것 같아요. “이 병원의 이름은 ‘우리’입니다.”라는 말에 걸맞게 병원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고, 이후 운영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시도록 더 애를 써야 할 것 같아요. 전태일의료센터가 ‘일하는 사람들의 좋은 병원’을 표방하는 만큼 이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의 근무 환경이나 처우개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6. 암 투병 중이라 운신이 편치 않으신데요. 그럼에도 가끔 뵐 때마다 뿜어나오는 에너지나 고민의 말씀을 접하다 보면 오히려 제가 따라가기 힘들 때가 많아요.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어떠신가요?

 갖고 있는 병은 소문내라고 하던데 제가 전립선암 4기 판정을 받은 지 이제 2년이 되었습니다. 가끔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사는 날까지 열심히 기쁘고 즐겁게 일하자! 이런 다짐을 매일 합니다. 전태일의료센터 일은 생각하는 것보다 잘 돼서 ‘평생친구’를 모시는 일도 그렇게 잘 되면 병도 저절로 잘 낫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Q7. 올해도 절반이 갔네요. 계획하는 바가 있으신가요?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지 좀 오래되어서 개인적으로 무슨 계획은 없는데요. 병을 얻기 전에 평생 처음으로 좋아하는 도시에 한 달간 혼자 머문 적이 있어요. 올해 또 한 번 다녀오고픈 바람은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진행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후원 공연을 클래식으로 하자고 제안해 놓은 게 있어요. 세계적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피아노 콘서트를 하기로 했는데 내년에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게 기대가 많이 됩니다. 다시 생각해도 참 멋지고 아름답고 감격적인 공연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Q8. 전태일의료센터가 어떤 곳이길 바라시나요? 기부를 망설이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문턱이 없는 병원,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오는 병원, 그리고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뿐 아니라 전태일의료센터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이 즐겁고 기쁘게 일하는 병원, 그런 “내 병원”이기를 소망합니다.

병원은 우리가 평생 다닐 수밖에 없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약자나 의료취약 계층에게는 문턱이 좀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병원에 아는 의사나 직원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굳이 필요없는 병원, 그런 전태일의료센터를 우리가 함께 만들고 지킬 수 있다면 건강을 지키는데 훨씬 편한 환경이 될 겁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그런 병원이 몇 군데나 될까요? 전태일의료센터에 기부한다는 건 그런 의미있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 커지는 일이 될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Q9.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시집에 ’택배‘라는 시가 있어요.

 

슬픔이 택배로 왔다.

....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 이웃을 찾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 이 시를 읊조리는데 전태일의료센터가 생각이 나더군요.

그리고 얼마 전에 정호승 시인과 가수 안치환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요. 1982년에 쓰신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라는 시에 안치환 씨가 곡을 붙인 노래를 불렀어요. 늘 듣던 노래였는데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구절에서 울컥했어요.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 제가 생각하기에 전태일의료센터를 위해 일하는 모든 분들, 추진위원들, 그리고 평생친구들은 모두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 희망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엄청 지쳐있을 때 전태일의료센터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지금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전태일의료센터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지치지 않게 합니다. 전태일의료센터를 더 사랑해 주세요.


>> 편집자 주_ 녹색병원

 녹색병원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사건으로 기록된 원진레이온 사태를 계기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투쟁의 성과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설립한 병원이다.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들이 앞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고 그 뜻은 1999년 경기도 구리시에 ‘원진녹색병원’, 2003년에는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에 ‘녹색병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개원 후 녹색병원은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는 물론 지역주민, 일반환자를 위한 치료에 전념해 왔으며 의료에 쉽게 접근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지원활동을 벌여왔다. 서서 일하는 마트노동자를 위한 의자 놓기 캠페인, 피자 30분 배달제 폐지, 포장박스에 손잡이 구멍 만들기, 직업성·환경성 암환자 찾기, PVC·유해물질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 등 건강한 몸과 건강한 노동,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캠페인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장시간 노동과 불안정 고용, 저임금 노동과 심각한 과로사 문제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일하다 다치고 병들어도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대부분 심적·물적 부담을 고스란히 개인 몫으로 떠안고 있다. 녹색병원은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환경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찾는 병원을 사회연대로 함께 만들자는 문제의식에서 2023년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제안하였다.

※ 녹색병원 홈페이지 www.greenhospital.co.kr